창세기 19장 27-29절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창세기 19장 27-29절)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연기(키토르)는 번제를 태워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제물을 태워서 나오는 연기다. 소돔과
고모라가 태워져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다. 출애굽기 29장 18절에서『그
숫양 전부를 제단 위에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롯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했는가, 아니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는가? 세상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 기도했으므로 롯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의 입장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한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대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모든 세상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받으시므로 구원받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천하만민을 위한 공의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유다서 1장 7절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음란은 영적 음란을 의미한다. 오늘날 복음과 율법을 겸히 여기는 자들이다. 다른 육체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성령의 불로 소멸시켜 버린다. 오늘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 같은 심판을 받았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번제로 하나님께 올려졌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로마서 5장 17-19절에서『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6장 5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우리의 옛사람이 무덤에서
장사되는 것이 세례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단번에 즉시 영원히 얻는 구원이다. 예수님과 연합된 자는『이미 내가 죽은 자이구나』라고 인정하는 사람 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새생명 즉 생명의 새로움을 얻는 것은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생명이다. 요한1서 3장 9절에서『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다.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고, 방언과 예언기도를 하고, 능력을
행하고, 그런 통로가 되어도, 그게 그 사람이 회개하여 변화된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할 것이다. 주님은 마음을 변경하지 않으신다. 노아의 하나님이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나 다 동일하신 분이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변한 적이 없다. 우리도 그 당시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노아가 아니라 노아의 도를 받지 아니할 진노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라는 말이다.
성경에서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하지,『믿음의 세례』라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이『노아의 당시 내가
살았더라면 내가 예수 믿기로 했으니까 나는 노아의 말을 따르고 믿을 자가 될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세례를 받는다.
세례를 받으면서『내가 방주에 들어갈 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건 세례가 아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어 장사되는 것이다. 우리는 방주에 못들어 가고 물 속에 수장된 사람들이다. 세례를 받을
때 물에 들어가는 의미가 바로 이런 뜻이다. 이것이 회개다.
우리는 주님이 건져주시지 않을 자들이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회개요 세례다. 『인간은 탕자처럼 아버지에게
돌아갈 자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다. 탕자의 비유는 누가복음 15장에서 나오지만 14장에서는 주님이 잔치를 예비했는데,『다 일치하여 사양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모습이다.『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심히』라는 말은 치유될 수 없을 만큼 부패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노아의 당시, 노아와 가족 7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몰랐다. 복음이 선포되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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