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장 17-25절

 

여호와께서 넓은 땅을 주셨으니

 

(창세기 26 17-25)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삭이 그랄 골짜기에 거류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이주하여 살다가 다시 돌아가는 여정을 성경은 보여주신다. 그래서 그랄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거하는 그 곳을 의미한다. 골짜기(나홀)는 강물이라는 단어와 관계가 있다. 강물은 나하르라는 단어다. 분리되는 말씀으로서, 에덴동산으로부터 분리되는 강들이 등장한다.

골짜기에 장막을 쳤는데, 장막은 울타리 안에 있는 생명들을 위해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장막은 핸과 하다드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핸은 울타리 안에 있는 생명체를 의미한다. 하다드는 보여지는 문이 두개라는 의미다. 문이 두개라는 것은 들어갔다가 나오는 문이다. 문은 성전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성전은 율법 속에서 나타난 성전이 아니라, 이루어진 임마누엘로서 성전을 의미한다. 성전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거듭난 자들이 성전이 되는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설명하신다. 그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아세르 베헤르)들을 다시 팠으니』아세르는 분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율법을 그랄 골짜기에 다시 팠다는 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생명나무를 맛보는 것이다. 아비멜레과 아브라함이 서로 맹세를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아비멜렉(사탄)은 자기의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상관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린 것이다. 즉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 막은 것이다. 그런데, 이삭이 우물을 세번이나 판다. 첫번째 우물을 에섹이라 하고, 두번째 우물을 싯니라고 했으며, 세번째 우물을 르호봇이라고 했다.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팠는데, 종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상징한다. 하나님 말씀을 상징하는 율법을 통해서 생명을 발견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되었다. 그런데, 악한 자들이 다시 우물을 뺏으려 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율법은 자기들 것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의 일을 하므로 자기의 것이라는 의미다. 세상적인 이야기로 율법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우물의 이름들이 분쟁, 적대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르호봇에 이르러서는 분쟁이 사라졌다.

르호봇은 더 넓은 곳을 의미한다. 넓은 지역은 큰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사도행전 1 8절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처럼, 말씀이 확대되는 것이다. 악한 자들이 우물을 뺏으려고 하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율법에 얽혀 있는 모습이다. 사도행전 13 45-46절에서 그 모습이 잘 나타난다. 그래서 복음이 더 넓은 이방인에게로 나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삭은 그곳으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다. 올라간다는 것은 다시 그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올라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밤은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을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복은 그리스도이시다. 율법 속에 감추어진 복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는 복을 얻는 것이다.

브엘세바에 가서 단을 쌓고 그곳에서 우물을 팠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의미다. 즉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상징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율법이며, 율법 속에는 생명 나무가 숨겨져 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있는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보려고 하다가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인 약속의 씨(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생명의 나무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맹세를 한 후 아브라함이 에셀나무를 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에셀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생명나무다. 이 심었다 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를 심었다 라는 의미와 노아가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라는 것과 같은 의미다. 생명나무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속에 있음을 명백히 밝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에셀나무를 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브엘세바에는 율법 즉 율법 속에는 생명 나무가 있을 것이라고 하나, 사탄은 그것을 항상 속일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팠던 우물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주셨다. 결국 그 열매를 먹고, 자기의 일(율법)을 하는 것이다. 율법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해놓는 규칙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율법의 의미는 자기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율법의 규정들을 보면서 날마다 죄를 짓나 안짓나 살펴보는 모든 행동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선하게 되어 보려고 행동을 하게 된다. 드러나 도무지 그렇게 한다고 마음의 탐욕까지 없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율법을 통해서 깨달아라는 것이다. 우물은 생명의 말씀을 제공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의 씨의 약속은 이삭에게 자동적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삭과 언약을 다시 체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동일하게 이삭에게도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것이 새언약이다. 하나님은 계속 새언약을 체결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에게도 언약을 체결하신다. 그래서 야곱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새언약을 체결하는 백성들에게 영적 축복을 하신다.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고 피를 마시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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